제2부: 도시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회. 역사 속 도시농부: 위기의 흙에서 희망을 경작하다
지난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도시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녹색 혁명의 시작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혁명은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도시의 텃밭은 거대한 사회적 격변기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사람들을 먹이고, 위로하며, 공동체를 지탱해 온 위대한 생존의 DNA와도 같습니다. 오늘은 그 잊혀진 역사의 책장을 함께 넘겨보려 합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구원의 식량, ‘승리 텃밭(Victory Garden)’
상상해 보십시오. 남성들은 모두 전선으로 떠나고, 도시에는 사이렌 소리와 불안감만이 가득합니다. 식량을 실어 나르던 배와 기차는 군수물자를 옮기기에도 벅찹니다. 상점의 진열대는 날마다 텅텅 비어갑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의 수많은 도시가 바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때, 각국 정부는 시민들을 향해 절박한 외침을 보냈습니다. 영국에서는 “Dig for Victory(승리를 위해 파라)!”, 미국에서는 “Our Food is Fighting(우리의 식량은 싸우고 있다)!”이라는 구호가 담긴 포스터가 도시 곳곳에 나붙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 텃밭(Victory Garden)’ 캠페인의 시작입니다. 시민들은 총 대신 호미를 들고 도시의 모든 땅을 경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의 하이드파크, 뉴욕의 타임스퀘어 인근 공터, 심지어 버킹엄 궁전의 잔디밭까지 예외는 없었습니다.
도시에 남겨진 여성, 노인, 아이들은 전시의 또 다른 군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낡은 옷을 작업복 삼아 입고 나가 땅을 갈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었습니다. 이 작은 텃밭에서 자라난 감자, 토마토, 양배추는 굶주린 가족의 배를 채우는 귀중한 식량이자, 전시에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비타민 공급원이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전쟁 막바지에는 약 2,000만 개의 승리 텃밭에서 미국 전체 채소 생산량의 40% 이상을 담당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식량 자급을 넘어, 농산물 수송에 쓰일 철도와 트럭, 연료를 군사용으로 돌릴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전략적 기여였습니다.
하지만 승리 텃밭의 진정한 가치는 흙을 파는 행위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나도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과 연대감을 심어주었고, 함께 땀 흘리며 수확물을 나누는 과정은 전쟁의 공포와 불안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공동체적 치유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이 끝나고 대규모 산업형 농업과 슈퍼마켓이 등장하면서, 이 위대했던 풀뿌리 농업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갔습니다.

산업혁명의 잿빛 도시를 위로한 녹색 쉼터,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
시간을 19세기로 돌려 독일의 산업혁명 시대로 가보겠습니다. 도시의 공장 굴뚝은 쉴 새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냈고, 농촌을 떠나온 노동자들은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비좁고 비위생적인 공동주택에 모여 살았습니다.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병들었고, 어른들은 삶의 활기를 잃어갔습니다.
이런 잿빛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독일의 의사이자 교육가였던 다니엘 슈레버(Daniel Schreber) 박사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도시 안에 정원을 만들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뛰어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사후, 그의 뜻을 기린 사람들이 라이프치히에 첫 ‘슈레버 정원’을 만들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노동자 가족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땅을 임대해 텃밭을 가꾸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 바로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 작은 정원)’으로 진화했습니다.
클라인가르텐은 단순한 텃밭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보통 ‘라우베(Laube)’라 불리는 작은 오두막이 있어 주말 동안 가족이 머물며 쉴 수 있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법으로 클라인가르텐을 보호했으며, 정원의 3분의 1은 채소, 3분의 1은 과일나무, 나머지 3분의 1은 잔디나 꽃을 심도록 하는 규정을 두어 생산과 휴양, 그리고 생태적 가치의 균형을 맞추도록 했습니다.
이 작은 정원은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신선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생산의 공간이자, 가족과 함께 자연의 품에서 안식을 찾는 재충전의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농사 정보를 교류하고 수확물을 나누며 맥주를 곁들이는 과정 속에서 끈끈한 공동체가 형성되는 사교의 장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독일 전역에 100만 개 이상이 운영되며, 주말마다 정원으로 향하는 독일인들의 모습은 단순한 여가를 넘어 삶의 일부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삶의 지혜가 담긴 작은 우주: 우리의 텃밭과 뒤뜰
서양의 역사가 이처럼 거대한 사건과 운동을 중심으로 도시농업을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역사 속 도시농업은 훨씬 더 일상적이고 소박한 지혜의 형태로 존재해 왔습니다. 바로 ‘텃밭’과 ‘뒤뜰’의 문화입니다.
급격한 산업화로 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도시로 향하던 1960~70년대를 떠올려 봅니다. 단칸방살이를 시작한 어머니들은 집주인의 허락을 얻어 장독대 옆 자투리땅에, 혹은 양지바른 뒤뜰 한 켠에 고향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는 정부의 캠페인이나 사회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비록 낯선 도시에 와 있지만, 흙을 만지고 제철 채소를 키워 먹던 삶의 방식을 놓지 않으려는, 우리 민족의 몸에 깊숙이 밴 농업적 본능이었습니다.

이 작은 텃밭은 ‘신토불이(身土不二)’ 철학의 실천 공간이었습니다. “내 몸과 땅은 둘이 아니니, 내가 사는 땅에서 난 것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믿음이죠. 깻잎, 상추, 풋고추, 대파, 아욱… 이 작은 땅에서 자라난 작물들은 돈을 아끼게 해주는 것을 넘어, 고된 도시의 삶 속에서 가족의 밥상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지켜주는 최소한의 자급자족(自給自足) 기반이었습니다.
또한 뒤뜰은 완벽한 순환의 공간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나온 쌀뜨물과 음식물 찌꺼기는 훌륭한 퇴비가 되어 텃밭으로 돌아갔고, 텃밭의 작물은 다시 가족의 식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제가 늘 이야기하는 ‘자연농법’과 ‘탄소농업’의 원리가 우리네 어머니들의 소박한 살림살이 속에 이미 녹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거창한 구호는 없었지만, 삶의 지혜로 이어진 우리의 텃밭과 뒤뜰 문화야말로 가장 조용하면서도 위대한, 우리만의 도시농업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봉쇄된 섬의 생존 전략, 쿠바의 ‘오르가노포니코스(Organopónicos)’
가장 극적인 현대의 사례는 쿠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로 쿠바는 하루아침에 석유, 비료, 농약 등 모든 지원이 끊기는 ‘특별 시대(Special Period)’를 맞게 됩니다. 식량 수입이 막히고 기계 농업이 불가능해지자, 심각한 기아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쿠바인들은 절망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았습니다. 바로 도시의 모든 땅을 유기농 텃밭으로 만드는 것이었죠. 주차장, 공터, 폐허가 된 건물터에 흙과 유기물을 채워 넣은 긴 화단, ‘오르가노포니코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이를 국가적 정책으로 지원했고, 도시 농부들에게 땅을 배분하고 농업 기술을 보급했습니다. 지렁이 분변토로 비료를 만들고, 해충을 잡기 위해 천적 곤충을 이용하는 등 완벽한 유기농 순환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그 결과, 수도 아바나는 현재 채소 소비량의 70% 이상을 도시 내에서 자급자족하는 세계 최대의 유기농 도시가 되었습니다. 쿠바의 사례는 외부의 거대 시스템이 붕괴했을 때,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도시농업이 얼마나 강력하고 회복력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한 위대한 생존의 기록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줍니다. 서양의 ‘승리 텃밭’처럼 국가적 위기에 맞선 거대한 움직임이든, 우리네 ‘뒤뜰 텃밭’처럼 일상 속에서 삶의 지혜를 이어온 소박한 몸부림이든, 도시농업은 인류의 생존을 책임지고 인간성의 회복을 도왔던 우리 안에 잠재된 오래된 본능이자 위대한 유산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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