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호미농부의 도시농업 대백과 12

12회. 공동 생산과 소비: CSA와 협동조합 이야기

안녕하세요, <스마트농업신문> 독자 여러분. 흙과 기술, 그리고 사람을 잇는 호미농부입니다. 👨‍🌾

지난 11회에서는 도시농부가 생산자를 넘어 가공, 판매, 서비스까지 아우르는 ‘1인 창조 기업가’, 즉 ‘도시농업 경영가’로 진화하는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샐러드 키트를 만들고, 팜투테이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역동적인 모습이었죠.

하지만 도시농업의 비즈니스가 꼭 ‘나 혼자’ 잘해서 성공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도시농업의 진짜 저력은 삭막한 도시에서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시 ‘우리’로 묶어내는 데 있습니다.

오늘 12회에서는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소유가 아닌 공유로 지속가능한 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두 가지 강력한 모델, ‘지역사회 지원 농업(CSA)’과 ‘협동조합’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CSA (지역사회 지원 농업): 소비자가 농부의 ‘우산’이 되다

우리가 마트에서 채소를 살 때, 우리의 관계는 계산대에서 돈을 지불하는 순간 끝이 납니다. 농부가 누구인지, 올해 태풍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죠. 이것이 전형적인 ‘단절된 소비’입니다.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지역사회 지원 농업)는 이 관계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쉽게 말해 ‘농산물 구독 경제의 원조’격인 모델입니다.

CSA의 핵심: ‘위험’과 ‘풍요’를 함께 나누는 연대

소비자는 농사가 시작되기 전(주로 봄), 농부에게 1년 치 혹은 한 시즌의 농산물 대금을 미리 지불합니다. 그리고 수확철이 되면 매주 혹은 격주로 농장에서 갓 수확한 ‘제철 농산물 꾸러미’를 배송받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결제’의 의미입니다. 농부는 이 돈으로 씨앗을 사고, 퇴비를 마련하고,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해 태풍이 와서 수확량이 줄면 어떻게 될까요? CSA 회원은 불평하는 대신 평소보다 조금 적고 못난 채소를 받게 됩니다. 반대로 대풍년이 들면? 넘치도록 풍성한 꾸러미를 받게 되죠. 즉, 소비자가 단순한 구매자를 넘어, 농사가 가진 본질적인 ‘자연의 위험(Risk)’을 농부와 함께 짊어지는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도시형 CSA: 얼굴 있는 거래의 완성

도시농업에서 CSA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물리적 거리가 극단적으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 로비로 배달되는 신선함: 아파트 단지 내 텃밭이나 인근 상가 옥상 농장에서 수확한 채소를 퇴근길 로비에서 픽업하는 모델이 가능합니다. 푸드 마일리지는 ‘엘리베이터 이동 거리’ 수준으로 줄어듭니다.
  • 관계 맺기 (Face-to-Face): 소비자는 주말에 농장을 방문해 일손을 돕거나(팜 파티), 내 아이가 먹을 채소가 자라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합니다. 이 과정에서 깊은 신뢰가 쌓이고, 농부는 내 이웃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들깻잎
들깨 깻잎 주말농장 (image. 호미농부)

2. 협동조합: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도시의 개별 농부들은 힘이 약합니다. 수직농장 시설비는 비싸고, 혼자서 생산·가공·마케팅을 다 하기도 버겁습니다. 소비자 역시 안전한 먹거리를 찾기 위해 개별적으로 동분서주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공동의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자조적인 조직이죠.

생산자 협동조합: 뭉쳐야 산다

도시농부들이 모이면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 공동 브랜드 및 마케팅: 각자의 작은 텃밭에서 나온 생산물을 하나의 통합된 로컬 브랜드로 만들어 판매하면 인지도를 높이고 안정적인 판로를 개척할 수 있습니다. (예: ‘은평구 옥상농부들’ 브랜드)
  • 시설 및 장비 공유: 고가의 착즙기, 건조기, 저온 저장고 같은 가공 시설이나 스마트팜 측정 장비를 공동으로 구매하여 이용하면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습니다.
  • 기술 및 정보 교류: 혼자 고민하던 병충해 문제나 스마트팜 데이터 분석 노하우를 공유하며 함께 성장하는 학습 공동체가 됩니다.

소비자 협동조합 & 사회적 협동조합: 먹거리로 마을을 바꾸다

  • 소비자 협동조합: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 도시민들이 출자금을 모아 만듭니다. 한살림이나 아이쿱생협이 대표적이지만, 도시농업에서는 더 작은 단위의 ‘마을 부엌’이나 ‘공동 구매 모임’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지역 도시농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안정적인 소비처가 됩니다.
  • 사회적 협동조합: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도시농업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합니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이나 경력 단절 여성, 어르신들과 함께 도시 텃밭을 가꾸고 일자리를 만드는 ‘케어팜(치유농장)’ 형태의 협동조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시농업 사회적협동조합 가상 회의 이미지
사회적협동조합은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도시농업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합니다 (image. Gemini 생성 이미지, 호미농부)


호미농부의 제언: ‘거래’에서 ‘관계’로의 회복

원래 농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공동체 활동’이었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을 나누는 모든 과정이 이웃과 함께 이루어졌죠. 산업화와 도시화는 이 끈끈했던 관계를 ‘화폐를 매개로 한 차가운 거래’로 바꿔버렸습니다.

도시농업의 CSA와 협동조합 모델은, 잃어버렸던 이 ‘관계의 따뜻함’을 현대 도시의 문법으로 복원하는 운동입니다.

CSA 회원이 된다는 것은 내 이웃 농부의 삶을 지지하는 투자가가 되는 일이며, 협동조합원이 된다는 것은 수동적인 소비자를 넘어 내 먹거리 환경을 주체적으로 바꿔나가는 시민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이유는 단순히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함께 잘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흙을 매개로 다시 연결된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회복력 있는 도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도시농업은 경제와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요? 흙에는 아직 우리가 다 말하지 못한 놀라운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음 13회에서는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도시농업의 치유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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