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정원부터 도시의 옥상까지, 지속가능한 농업의 지혜를 담다
제 텃밭 한쪽에는 목재로 단정하게 짜인 사각형의 밭이 하나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끙끙대며 옮기고, 좋은 흙으로 정성껏 채운 저만의 ‘네모 우주’입니다. 그 안에서는 쌈채소와 허브가 계절마다 풍성하게 자라나고, 흙은 언제나 보송보송하게 살아 숨 쉽니다. 이 작은 프레임 하나가 농사의 수고를 덜어주고 기쁨을 배가시키는 마법을 저는 매일 경험합니다.
최근 도시의 옥상, 아파트 베란다, 주말농장 어디에서나 이 ‘틀밭(Container Garden 또는 Raised Bed라고 부른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틀밭은 도시민들이 채소를 키우는 경험을 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에, 현대 도시농업의 상징처럼 성장했습니다 (아래 틀밭 이미지 참조).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나무 상자에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농업적 지혜와 자연을 존중하는 철학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틀밭은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보여주고 있을까요?
틀밭의 기원: 작은 상자에서 시작된 농업 혁명
틀밭의 개념은 땅을 경작하는 행위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고대 문명은 경계를 만들고 흙을 돋우어 물을 관리하고 작물을 키웠습니다. 그 원형이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약초와 채소를 종류별로 구분하고, 질서정연한 틀 안에서 효율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이때의 틀밭은 생존을 위한 ‘관리 농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에서는 틀밭이 예술의 경지로 올라섭니다. 채소, 허브, 꽃을 기하학적 틀 안에 함께 심어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한 ‘포타제(Potager)’ 가든이 바로 그것입니다. 틀밭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공간을 넘어, 눈으로 즐기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공간으로 진화했습니다.
틀밭이 대중 속으로 파고든 것은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입니다. 부족한 식량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장려된 ‘승리 정원(Victory Garden)’ 운동 속에서, 시민들은 좁은 공간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틀밭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이때부터 틀밭은 전문가의 영역을 넘어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시민 농업’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왜 틀밭인가?: 흙과 사람을 살리는 명확한 이점
틀밭의 유행은 단순한 멋이 아닌,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이점에 기반합니다.
첫째, 완벽한 토양을 제어하는 축복입니다. 아파트 화단이나 도심의 땅은 건축 폐자재나 오염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틀밭은 이런 걱정 없이, 내가 원하는 건강한 흙(상토, 퇴비, 부엽토 등)을 직접 배합하여 채울 수 있습니다. 작물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셈입니다.
둘째, 탁월한 배수와 통기성으로 뿌리를 건강하게 합니다. 틀이 지면보다 높이 솟아있어 장마철에도 물이 고이지 않고 잘 빠져나갑니다. 흙 사이로 공기도 원활하게 통해 뿌리가 숨 쉬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 과습으로 인한 병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셋째, 더 빨리 봄을 맞이합니다. 틀밭의 흙은 일반 노지보다 햇볕을 받는 면적이 넓어 봄철에 지온이 더 빨리 상승합니다. 이는 곧 파종 시기를 앞당기고 작물의 초기 생육을 왕성하게 만드는 비결이 됩니다.
넷째, 허리를 지키는 ‘사람 중심’의 농사입니다. 쭈그려 앉아 김을 매거나 허리를 깊이 숙여 수확할 필요가 없습니다. 틀의 높이를 농사 작업자에게 맞춰 조절하면 의자에 앉거나 선 채로도 밭일을 할 수 있어, 어르신이나 몸이 불편한 분들도 농사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이 외에도 물리적인 상자 형태로 구성해 명확한 경계를 가져 잡초 관리가 수월하고, 달팽이 같은 일부 해충의 접근을 물리적으로 막아주며, 고랑 없이 밭 전체를 사용하므로 단위 면적당 더 많은 작물을 심어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도 있습니다.
세계의 틀밭: 각 지역의 기후와 문화를 담다
틀밭이라는 기본 개념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각 지역의 기후와 문화에 맞게 독창적인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영국의 ‘얼랏먼트(Allotment)’는 도심 속 시민 농장의 오랜 전통을 보여줍니다. 저마다 개성 있는 틀밭들이 모여 단순한 텃밭을 넘어 이웃과 교류하는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영국에서 ‘얼랏먼트(Allotment)’는 주로 도시나 교외 지역의 주민들이 채소, 과일, 꽃 등을 직접 재배할 수 있도록 지방 정부나 기타 단체에서 소규모로 분할하여 임대해 주는 텃밭 구획을 말합니다. 한국의 주말농장이나 도시농업 텃밭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역사와 문화적 배경, 그리고 운영 방식에서 영국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집니다.
얼랏먼트의 역사는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특히 19세기 산업혁명과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 빈민층의 자급자족을 돕고 건강을 증진하는 수단이었고, 전쟁 중에는 ‘Dig for Victory’ 캠페인처럼 식량 증산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에는 ‘Allotments Acts’라는 얼랏먼트 관련 법률이 존재하며, 이는 지방 정부가 일정 수 이상의 주민이 요청할 경우 얼랏먼트 부지를 제공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얼랏먼트 구획은 크기가 다양하지만, 보통 ‘로드'(rod)라는 전통 단위로 측정됩니다. 10로드(약 250m²) 정도가 일반적인 크기로, 한 가족이 먹을 충분한 채소를 기를 수 있는 면적입니다.
미국의 ‘스퀘어풋 가드닝(Square Foot Gardening)’은 실용주의의 산물입니다. 틀밭을 가로세로 1피트(약 30cm)의 정사각형으로 구획하고, 각 칸마다 심을 수 있는 작물의 수를 정해놓은 이 방식은 초보자도 실패 없이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과학적인 시스템입니다.
스퀘어풋 가드닝은 미국의 은퇴한 엔지니어이자 작가인 멜 바돌로뮤(Mel Bartholomew)가 창안한 텃밭 가꾸기 방식으로, 작은 공간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수확량을 얻기 위해 고안된 체계적인 재배법입니다. 특히 도시농업이나 초보 농부에게 매우 효율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피트 단위의 격자망은 스퀘어풋 가드닝의 가장 상징적인 특징입니다. 보통 가로세로 4피트(약 1.2m) 크기의 틀밭(Raised Bed)을 만들고, 그 안을 1피트 간격의 격자(Grid)로 나눕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16개의 네모 칸(Square Foot)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미니 텃밭이 됩니다.
여기에는 기존의 텃밭 흙을 사용하지 않고, 멜 바돌로뮤가 고안한 이상적인 배합의 흙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이 흙은 퇴비, 피트모스(또는 코코넛 코이어), 질석(버미큘라이트)을 1:1:1 비율로 섞어 만듭니다. 따라서 배수와 통기성이 뛰어나고, 영양이 풍부하며, 잡초 씨앗이 없어 관리가 매우 쉽습니다. 또한 흙이 부드러워 경운(땅을 가는 일)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스퀘어풋 가드닝은 ‘틀밭 + 격자 + 특수 상토’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를 통해 “더 적은 공간과 노력으로 더 많이 수확한다”는 목표를 과학적으로 실현하는 매우 체계적인 도시농업 방법론이라 부를 만 하지요.

독일의 ‘휴겔쿨투어(Hügelkultur)’는 자연을 가장 깊이 닮은 틀밭입니다. 썩어가는 통나무와 낙엽, 풀 등을 땅속에 묻어 언덕 형태의 밭을 만듭니다. 땅속의 유기물은 시간이 지나며 분해되어 스스로 양분을 공급하고, 썩은 나무는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어 가뭄을 이겨내는 ‘살아있는 저수지’가 됩니다. 지속가능한 생태 농업의 지혜가 담긴 모델입니다.
휴겔쿨투어의 핵심은 바로 ‘썩어가는 나무’에 있습니다. 밭의 중심부에 통나무, 굵은 나뭇가지 등을 쌓고 그 위를 잔가지, 낙엽, 퇴비, 흙 등으로 덮어 언덕 모양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밭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의 나무가 천천히 부패하며 놀라운 일들을 해냅니다.
썩어가는 나무는 수분을 엄청나게 잘 흡수하고 저장합니다. 비가 오면 물을 가득 머금었다가 가뭄이 들 때 작물에 서서히 공급해주죠. 물 주는 횟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물 부족 국가나 건조한 기후에 매우 유리합니다. 또한 나무와 유기물이 분해되면서 미생물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작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수년간 꾸준히 공급합니다. 별도의 비료 없이도 기름진 땅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죠.
지구 반대편 남미 대륙의 놀라운 지혜가 담긴 틀밭인 ‘와루와루(Waru Waru)’는 잉카 문명 이전부터 안데스 고산지대에 살아온 원주민들의 독창적인 생존 기술 농법입니다. 와루와루는 현재의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 주변 고원지대에서 발달한 고대 농업 시스템입니다. 이 지역은 낮에는 햇볕이 뜨겁고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일교차와 잦은 홍수, 서리 피해로 농사가 매우 어려운 곳이죠. 이런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인들은 땅을 독특한 모양으로 설계했습니다.
와루와루는 한마디로 ‘높은 밭이랑과 물길(수로)이 결합된 형태’의 틀밭입니다. 흙을 파서 1m 정도 높이의 둑(밭)을 만들고, 파낸 자리는 자연스럽게 물이 차는 수로가 되도록 설계했죠. 와루와루의 핵심은 바로 옆에 있는 ‘수로’입니다. 수로의 물은 낮 동안 태양열을 가득 흡수하여 저장합니다. 그리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추운 밤이 되면, 저장했던 열을 서서히 방출하여 밭의 흙을 데워줍니다. 이 덕분에 밭의 온도가 주변보다 1~2도 높게 유지되어 작물이 서리 피해를 입는 것을 막아주죠. 그야말로 자연의 에너지를 활용한 천연 난방 시스템입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수로가 넘치는 물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여 밭이 잠기는 것을 막아줍니다. 반대로 건기에는 저장해 둔 물이 마르지 않고 밭에 꾸준히 수분을 공급하는 관개 시스템이 됩니다. 물을 다스리는 탁월한 지혜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또한 수로 바닥에는 물고기의 배설물이나 수생 식물 등 유기물이 풍부하게 쌓입니다. 농부들은 주기적으로 이 퇴적물을 긁어내 밭의 비료로 사용했습니다. 외부에서 비료를 가져올 필요 없이 자급자족하는 완벽한 자연 순환 농법이죠.

지금까지는 오랜 역사속의 틀밭의 형태를 소개했는데요. 이번엔 바로 현대 생활속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틀밭을 알아볼까 합니다.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절박한 위기 속에서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린 놀라운 지혜, 바로 쿠바의 도시형 틀밭, ‘오르가노포니코스(Organopónicos)’입니다.
‘오르가노포니코스’는 유기농을 뜻하는 ‘Organico’와 수경재배를 의미하는 ‘Hidroponico’의 합성어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첨단 기술 같지만, 사실은 쿠바인들의 생존을 위한 눈물과 땀이 담겨있는 매우 현실적인 농업 방식이죠.
1990년대 초, 쿠바는 최대 지원국이었던 소련의 붕괴로 극심한 경제 위기를 맞습니다. 석유 수입이 끊기면서 비료, 농약, 농기계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식량 운송마저 마비되었습니다. 전 국민이 굶주림의 공포에 직면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쿠바 정부와 국민들은 “우리 손으로, 우리 도시에서 먹거리를 만들자!”고 결심합니다. 도시의 버려진 공터, 주차장, 건물 옥상 등 흙이 없는 곳이라도 채소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고, 그 해답이 바로 ‘오르가노포니코스’였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흙을 담는 틀을 벽돌이나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흙이 오염되었거나 아예 없는 아스팔트 위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고안된 방법입니다. 특히 화학 비료 대신 사탕수수 찌꺼기, 지렁이 분변토, 음식물 쓰레기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유기물을 퇴비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해충 방제 역시 천적을 이용하거나 식물 추출물을 활용하는 철저한 유기농법을 고수합니다.
쿠바의 오르가노포니코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성공적인 도시농업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현재, 이 모든 지혜가 우리의 도시와 만나고 있습니다. 옥상과 베란다의 조건에 맞게 플라스틱, 부직포, 재활용 목재 등 다양한 소재의 틀밭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생태 교육장으로, 아파트 단지에서는 공동체 텃밭으로 틀밭이 새로운 관계를 싹 틔우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의 ‘네모난 우주’를 시작하세요
틀밭은 단순히 흙을 담는 상자가 아닙니다. 척박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고,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며, 노동의 고됨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철학이 담긴 농업 플랫폼’입니다. 고대의 지혜에서 시작하여 현대 도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틀밭은 인류가 흙과 관계 맺어온 가장 똑똑하고 따뜻한 방식 중 하나인 것입니다.
아직 망설이고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나무 상자 하나, 혹은 플라스틱 화분 하나라도 좋습니다. 그 안에 건강한 흙을 채우고 작은 씨앗 하나를 심는 순간, 당신만의 위대한 ‘네모 우주’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당신은 흙이 주는 위로와 생명의 경이로움, 수확의 풍요로움을 모두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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